해당판결
가.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제3자로부터 약정한 돈을 전액 지급받는 것을 청구포기 등 합의의 효력발생요건으로 정하였다면, 이를 단순한 이행기한이 아니라 정지조건으로 볼 여지가 크다고 판단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나. 파기환송심 판결 — 확정
의정부지방법원 2019. 4. 4. 선고 2018나207305 판결〔물품대금〕
제3자로부터 대금을 지급받았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청구포기·부제소 합의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피고에게 미지급 물품대금 126,904,891원과 지연손해금 전액의 지급을 명하였으며, 확정된 사례이다.
하급심
관련판례
가. 조건과 불확정기한의 구별
약정된 사실이 발생하지 않으면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면 조건에 해당한다. 반면 그 사실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된 경우에도 채무를 이행하여야 한다면, 그 발생 여부의 확정을 불확정기한으로 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화해계약에 붙은 조건의 해석
대법원 1956. 1. 12. 선고 4288민상281 판결
대법원은 화해계약의 일부를 이루는 부관에도 조건과 기한을 구별하는 법리가 적용된다는 근거로 위 판결을 인용하였다.
관련법령
대법원 판결의 참조조문은 다음과 같으며, 판결에는 별도의 구법 표시가 없다.
- 민법 제105조: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법률행위의 내용 및 부관 해석.
- 민법 제147조: 조건 성취의 효과. 정지조건이 있는 법률행위는 조건이 성취된 때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 민법 제152조: 기한 도래의 효과.
- 민법 제731조: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약정하는 화해계약.
사실관계
가. 배관자재 공급과 미지급 물품대금
원고는 2014. 1.경부터 2015. 8. 31.경까지 피고 주식회사 듀코코리아의 주문에 따라 배관자재를 제작·납품하였다.
총 납품대금은 439,375,431원이었고, 피고가 지급한 금액은 312,470,540원이어서 126,904,891원이 미지급 상태로 남았다.
원고는 2015. 10. 22. 피고를 상대로 미지급 물품대금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피고도 같은 해 11. 6. 원고를 상대로 별도의 채무부존재확인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나. 피고의 거래처에서 직접 돈을 받아 분쟁을 정리하기로 한 합의
소송 계속 중인 2016. 8.경, 원고와 피고는 피고에게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제3자들로부터 원고가 직접 대금을 받는 방식으로 분쟁을 정리하기로 합의하였다.
당사자 관계는 다음과 같다.
원고는 피고로부터 채권추심 권한을 위임받아 위 회사들에 지급을 요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원고가 위 회사들에 배관자재를 직접 공급하여 발생한 대금을 청구한 구조는 아니다.
다. 실제 전액 수령을 전제로 한 청구포기·부제소 약정
합의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심은 제3자에게 돈을 받도록 정한 것만으로 원고가 곧바로 피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액을 지급받은 뒤 청구포기 등을 이행하도록 정하였다는 점이다.
라. 제3자들의 지급 거절과 기존 물품대금 청구의 유지
피고는 2016. 8. 31.경 자신이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등 소송을 취하하였다.
그러나 원고의 주장에 따르면 제3자들은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상계할 채권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지급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원고가 합의금액을 지급받았다는 증거도 없었다.
원고는 피고에 대한 기존 물품대금 청구를 유지하였고, 피고는 합의서에 따라 원고가 청구를 포기하였으므로 채권이 소멸하였다고 다투었다.
법리
가. 조건과 기한의 핵심 차이는 ‘그 일이 발생하지 않아도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에 있다
조건은 법률행위의 효력 발생 또는 소멸을 장래 발생 여부가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시키는 부관이다.
기한은 장래 반드시 실현되는 사실을 기준으로 효력 발생 또는 소멸의 시점을 정하는 부관이다. 실현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반드시 실현되는 사실이면 불확정기한이 될 수 있다.
약정의 의미가 불분명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이 사건에 대입하면 쟁점은 “제3자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원고가 피고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여야 하는가”이다.
대법원은 합의서의 문언과 거래 목적에 비추어, 실제 전액 수령 없이도 원고가 청구를 포기하여야 한다고 해석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나. ‘전액 지급받은 후 효력이 발생한다’는 문언과 합의의 경제적 목적을 함께 고려한다
합의서 제10항은 모든 합의사항의 이행이 원고의 전액 수령 후 효력을 발생한다고 정하였다. 대법원은 이 문언을 청구포기·부제소 등의 의무가 발생하기 위한 요건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에 다음 사정이 뒷받침되었다.
- 제3자의 지급은 장래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보장된 사실이 아니었다.
- 원고가 미지급 대금을 회수할 것이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고에 대한 채권을 포기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 제3자들은 실제로 채무의 존재나 상계 여부를 다투고 있었다.
따라서 채권을 추심할 기회를 부여받은 것과 채권을 실제로 회수한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청구포기의 전제는 추심 권한의 취득이 아니라 대금 전액의 현실적인 수령이었다.
다. 화해계약이라는 이유만으로 청구포기의 효력이 즉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화해계약은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하는 계약이다. 그러나 화해계약에도 효력발생조건을 붙일 수 있다.
따라서 분쟁을 종결하려는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조건 조항을 배제하거나 단순한 이행기한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도 화해합의의 존재와 청구포기·부제소 약정의 효력 발생은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 합의서를 작성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기존 채권이 곧바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라. 조건이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기존 물품대금 청구가 가능하다
파기환송심은 원고가 제3자들로부터 126,904,891원을 모두 지급받아야 청구포기·부제소 특약을 포함한 원고의 이행의무가 발생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실제 지급을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정지조건은 성취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피고의 채권소멸 항변은 배척되었다.
이 사건은 이미 효력이 발생한 청구포기 합의를 해제하여 채권을 되살린 사례가 아니다. 청구포기 등의 효력발생조건이 성취되지 않아 기존 채권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사례이다.
또한 피고가 자신의 소송을 먼저 취하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원고의 실제 대금 수령이라는 별도의 조건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마. 원고의 1,700만 원 지급의무도 실제 수령을 전제로 한다
원고가 피고에게 지급하기로 한 1,700만 원 역시 제3자들로부터 약정금액을 모두 받는 즉시 지급하도록 정하였다.
제3자들의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그 약정만을 이유로 피고의 기존 물품대금채무에서 1,700만 원을 당연히 공제할 수는 없다.
환송심이 인정한 원금도 126,904,891원 전액으로, 1,700만 원을 차감한 금액이 아니다.
바. 하자 주장에 따른 해제·상계 항변도 증거 부족으로 배척되었다
피고는 환송심에서 배관자재에 녹 발생 등 중대한 하자가 있었으므로 공급계약을 해제하거나 손해배상채권으로 상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법원은 다음 사정을 고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원고는 피고의 요청에 따라 아연도금 스프레이 방식으로 가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피고가 주장하는 하자가 원고의 귀책으로 발생하였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였다.
- 피고의 거래처가 주장한 규격 불량·불일치 등에 대해서도 원고의 책임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였다.
- 계약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하자나 그로 인한 손해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
따라서 환송심은 조건 미성취에 따른 기존 채권의 존속을 인정한 데 이어, 그 채권을 소멸·감축시킬 별도의 해제 또는 상계 사유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실무적 유의점
가. 제3자에게 받기로 한 합의에서는 기존 채무의 소멸 시점을 명시해야 한다
제3자로부터 돈을 받도록 정하는 경우에는 기존 채무가 언제 소멸하는지 구별하여 작성해야 한다.
즉, 추심 권한을 부여한 때인지, 채권을 양도한 때인지, 실제로 변제받은 때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는 실제 전액 수령이 청구포기의 전제였으므로 제3자의 미지급 위험을 원고가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나. 청구포기·부제소 조항은 지급 조항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
“나머지 청구를 포기한다”거나 “향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만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합의서 전체에서 그 효력을 실제 지급과 연결하고 있다면, 지급 여부부터 확인해야 한다. 특히 ‘전액’ 수령을 조건으로 한 경우에는 일부 지급만으로 포괄적인 권리포기 효과가 발생하는지 별도의 해석이 필요하다.
다. 지급 실패 시 처리와 기존 채권의 존속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사한 합의에서는 다음 사항을 함께 정할 필요가 있다.
- 제3자가 일정일까지 지급하지 않을 경우 기존 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 일부 회수한 금액은 기존 채권에서 어떻게 공제하는지.
- 청구포기·부제소 및 소 취하의무가 언제 발생하는지.
- 상대방에게 돌려주거나 지급할 금액도 실제 회수를 조건으로 하는지.
라. 판결 당시의 지연손해금 이율과 현재 적용 이율은 구별해야 한다
환송심 주문은 126,904,891원에 대하여 2015. 10. 1.부터 2019. 4. 4.까지 연 6%, 그 다음 날부터 완제일까지 연 15%의 지연손해금을 명하였다.
이는 해당 판결의 주문을 설명한 것으로, 연 15%를 현재 모든 물품대금 청구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이율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