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판결
해상운송 중 화물이 훼손된 사건에서, 선하증권에 기재된 배상액 제한약관은 별도의 합의가 없더라도 운송인의 불법행위책임에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불법행위청구라는 이유로 책임제한 항변을 배척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다만 운송인이 주장한 ‘1포장 또는 1단위당 영국화 100파운드’의 책임한도를 그대로 인정하거나 최종 배상액을 확정한 판결은 아니다.
환송 후 재판 결과와 사건의 최종 확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급심
서울고등법원 1982. 8. 9. 선고 82나404 판결
원심은 화물의 고박·고정장치를 충분히 갖추지 않고, 태풍으로 장치가 풀린 뒤에도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과실을 인정하여 운송인의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선하증권의 배상액 제한약관을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하기로 별도로 합의하였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운송인의 책임제한 항변을 배척하였다.
대법원은 운송상 과실을 인정하고 불가항력 항변을 배척한 판단은 수긍하였으나, 선하증권의 책임제한약관에 관한 판단에는 법리오해와 심리미진이 있다고 보았다.
관련판례
선하증권의 배상액 제한약관은 별도의 약정이 없는 한 불법행위책임에 당연히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종전 판결이다. 이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 부분을 변경하였다.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이 경합하여 병존한다는 법리까지 변경한 것은 아니다.
선하증권에 기재된 면책약관이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법리를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구 국제사법에 따라 운송계약과 관련된 불법행위의 준거법을 판단하고, 선하증권의 준거법 조항과 지상약관에 따른 책임제한을 검토하였다.
관련 내용은 ChatByun의 「선하증권의 준거법 분할과 지상약관에 따른 미국법상 책임제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관련법령
가. 판결 당시 적용 법령
- 민법 제390조, 제750조: 채무불이행 및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 구 섭외사법(2001. 4. 7. 법률 제6465호로 전부개정되기 전의 것) 제13조 제1항: 불법행위로 인한 채권의 준거법.
- 구 섭외사법(2001. 4. 7. 법률 제6465호로 전부개정되기 전의 것) 제44조 제5호: 선장과 해원의 행위에 대한 선박소유자의 책임범위에 관한 준거법.
- 구 상법(1991. 12. 31. 법률 제447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790조: 선박소유자의 의무 또는 책임을 경감하는 특약의 효력.
나. 현재 사건에서 함께 검토할 법령
- 상법 제797조, 제798조, 제799조: 운송인의 책임한도, 불법행위책임에 대한 적용 및 책임경감 특약의 제한.
- 국제사법 제52조: 불법행위의 준거법과 기존 법률관계에 따른 예외.
사실관계
포항종합제철은 유럽에서 공장 건설용 기자재를 도입하면서 여러 보험회사와 해상적하보험계약을 체결하였다. 운송인은 송하인과 해상운송계약을 체결하고, 자신이 용선한 선박에 기자재를 실어 1979. 7. 16. 서독 브레맨항을 출발하였다.
선원 등은 화물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박·고정장치를 충분히 갖추어야 했으나 이를 소홀히 하였다. 선박이 같은 달 31일 인도양에서 태풍을 만나자 화물의 고박이 풀리고 위치가 뒤틀렸다. 태풍이 지난 뒤에도 이를 완전히 정비하지 않아, 1979. 8. 20. 포항항에 입항할 때까지 화물이 계속 움직이고 서로 부딪치면서 일부가 파손되었다.
보험회사들은 포항종합제철에 보험금을 지급한 뒤, 보험자대위에 따라 운송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불법행위책임을 주위적으로, 운송계약상 채무불이행책임을 예비적으로 주장하였으나, 대법원은 이를 순위를 정한 선택적 청구로 보았다.
운송인은 태풍으로 인한 불가항력 사고라고 주장하는 한편, 선하증권 약관에 따라 배상책임이 1포장 또는 1단위당 영국화 100파운드 상당액으로 제한된다고 항변하였다.
법리
가.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은 함께 성립할 수 있다
운송인의 과실로 화물이 훼손되면 운송계약상 의무위반과 화물 소유권 침해가 동시에 문제 될 수 있다.
대법원은 두 책임이 발생요건과 효과를 달리하므로, 각각의 요건을 충족하면 손해배상청구권이 경합하여 병존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운송계약상 권리와 화물의 소유권을 함께 가진 선하증권 소지인은 어느 청구권이든 선택하여 행사할 수 있다.
계약관계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불법행위책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 청구권을 선택할 수 있어도 선하증권의 책임제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일반적인 운송계약의 면책특약과 선하증권에 기재된 면책약관을 구별하였다.
선하증권은 운송계약상 권리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 교부가 운송물에 관한 권리 취득에도 영향을 미치는 증권이다. 운송물의 권리를 양수하고 선하증권을 교부받은 소지인은 운송인에게 계약책임과 소유권 침해에 따른 불법행위책임을 함께 물을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선하증권에 책임제한약관을 기재한 운송인이 계약책임만 제한하고 불법행위책임은 제한 없이 부담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약관을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하려는 당사자 사이의 합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를 불법행위책임에 적용하기로 별도로 합의하였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제한 항변을 배척할 수는 없다.
다. 약관의 적용 가능성과 약관의 유효성은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
선하증권의 면책약관이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책임제한이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당시 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한계를 제시하였다.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불법행위책임에는 면책약관이 적용되지 않는다.
- 구 상법 제790조의 강행규정에 저촉되는 약관은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 다만 책임 자체를 제외하거나 입증책임·청구조건을 변경하는 약관과, 배상액의 일부를 제한하는 약관은 구별해야 한다. 당시 법 아래에서는 배상액 제한약관이 특별한 사정 없이 곧바로 제790조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에 따라 환송심은 실제 선하증권에 운송인이 주장하는 약관이 있는지, 그 약관이 유효한지, 해당 손해에 적용되는지를 심리해야 했다. 대법원이 100파운드의 책임한도를 최종 승인한 것은 아니다.
라. 태풍을 만났다는 사정만으로 불가항력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운송인은 선적 당시 충분한 고박·고정조치를 하고, 항해 중 장치가 풀린 경우에는 적절히 정비할 의무가 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과실을 인정하였다. 불가항력을 이유로 책임을 면하려면 당시 풍랑이 선적 시 예견할 수 없는 정도였고, 손해발생을 예방하는 조치도 불가능하였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태풍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는 일반적인 진술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마. 당시의 준거법 판단은 현행법과 구별해야 한다
대법원은 구 섭외사법 제13조 제1항의 불법행위 발생지에 행위지뿐 아니라 손해의 결과발생지도 포함된다고 해석하였다.
이 사건에서는 부실한 고박과 정비 소홀로 인한 화물의 파손이 포항항 도착 때까지 계속되었고, 국내외에서 발생한 손해를 명확히 나누기 어려웠다. 이에 손해 전체에 대한 불법행위청구에 대한민국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단순히 국내 항구에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내법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
또한 계약에 영국법을 적용한다는 선하증권 조항을 불법행위청구에도 영국법을 배타적으로 적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구 섭외사법에 따른 판단이다. 현행 국제사법 제52조 제3항은 당사자 사이의 기존 법률관계가 불법행위로 침해된 경우 그 법률관계의 준거법에 따르도록 정하고 있으므로, 현재 사건에서는 운송계약과 불법행위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실무적 유의점
청구원인의 선택과 책임제한의 적용을 구분해야 한다.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을 함께 주장하더라도, 선하증권의 유효한 책임제한약관이 불법행위청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소장 작성 단계부터 선하증권 앞뒷면의 약관, 준거법 조항, 지상약관 및 책임한도 조항을 확인해야 한다.
책임한도는 약관 문구와 운송자료를 바탕으로 검토해야 한다. 운송인이 포장당 한도를 주장한다면 해당 약관의 편입과 효력, 포장 또는 운송단위의 산정 근거, 화물의 수량·중량 등을 확인해야 한다. 이 판결의 ‘100파운드’는 해당 사건에서 운송인이 주장한 약정 한도이므로 다른 사건의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다.
현재의 책임제한 문제에는 현행법을 적용해야 한다. 대한민국 상법이 준거법이 되는 사건에서는 제798조에 따라 운송인의 책임에 관한 규정이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된다. 책임한도와 그 배제 여부는 제797조에 따라 판단하고, 책임경감 특약의 효력은 제799조와 함께 검토해야 한다. 특히 현행 제797조는 운송인 자신의 고의 또는 손해발생의 염려를 인식하면서 무모하게 한 행위를 책임제한 배제 사유로 정하고 있으므로, 이 판결의 당시 약관 해석을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
운송상 과실에 관한 증거를 구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고박계획, 선적 당시 사진, 항해·기상기록, 태풍 이후 점검 및 정비기록, 양륙 시 검정보고서 등은 과실과 손해의 발생 경위를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이 사건 역시 최초 고박 상태뿐 아니라 태풍 이후 정비를 하지 않은 사정이 함께 고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