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퇴직금 청구에 대한 소멸시효 항변과 권리남용

핵심 결론 퇴직금 미고지와 동일 업무의 계속만으로 소멸시효 항변이 권리남용이 되지는 않는다. 신의칙으로 시효 적용을 배제하려면 권리행사의 객관적 장애 등 특별한 사정이 엄격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이 자료는 서권식 변호사가 실무를 처리하면서 참조한 판례를 바탕으로, 실무상 유의할 점에 주안점을 두고 법리적 쟁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의 판례는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원문이 실려 있으면 그 원문으로 연결됩니다. 공개되지 않은 하급심·환송심 판결은 판결문을 직접 확보하여 정리합니다.
주요 판례·법령 2024다294705, 2002다32332, 2004다71881, 2016다218713, 2018다278023

판결번호

대법원 2025. 5. 29. 선고 2024다294705 판결

원심판결

서울고등법원 2024. 8. 28. 선고 2022나2049800 판결

관련판례

대법원 2002. 10. 25. 선고 2002다32332 판결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시효중단이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 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 2005. 5. 13. 선고 2004다71881 판결은 신의칙과 같은 일반조항을 근거로 실정법상 제도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후퇴시킬 수 있으므로,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칙에 반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 2016. 9. 30. 선고 2016다218713, 218720 판결도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권리남용으로 배척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관련법령

민법 제2조는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하고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민법 제162조는 채권의 일반적인 소멸시효기간을 규정한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10조는 이 법에 따른 퇴직금을 받을 권리는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소멸한다고 규정한다.
이 판결은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10조를 ‘구법’으로 표시하거나 특정 개정 법률번호를 기준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판결문의 표기를 따라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10조’로 표시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관계

피고는 장례업과 장례비품의 도소매·대여업 등을 영위하는 회사이고, 원고들은 장례지도사들이다.
원고 10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은 피고와 형식상 의전대행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피고의 지역본부에서 ‘의전팀장’으로 불리면서 2015. 11. 20.경까지 장례의전대행 업무를 수행하였다.
피고가 장례의전 업무를 별도의 소외 회사에 위탁하기로 하자, 나머지 원고들은 2015. 11. 21. 피고와 기존 위탁계약을 해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같은 날 소외 회사와 새로운 의전대행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각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소외 회사의 의전팀장으로 종전과 같은 장례의전 업무를 수행하였다.
새로운 위탁계약에는 원고들이 업무수행을 보증하기 위해 1,000만 원을 납부하고, 필요한 집기와 차량 등을 원칙적으로 자신의 비용으로 구입하며,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제3자를 대체 투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원고들이 별도 사업자로서 소외 회사의 근로자가 아니라는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원심은 원고들이 피고와 계약을 체결하고 근무한 기간에는 위탁계약의 형식과 달리 실질적으로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피고에게 근로를 제공하였으므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앞서 같은 형식의 의전대행 위탁계약을 체결한 장례지도사 22명도 피고를 상대로 퇴직금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2017. 4. 14. 선고 2016가합2384 판결로 청구를 전부 인용하였고, 서울고등법원 2018. 9. 18. 선고 2017나2022443 판결과 대법원 2019. 1. 31.자 2018다278023 판결을 거쳐 확정되었다.
원심은 이 확정판결의 장례지도사들과 이 사건 원고들의 계약 형식, 근무기간, 업무 내용 및 피고의 업무배분·관리감독 방식이 동일하거나 유사하다는 점도 근로자성 인정의 근거로 삼았다.
다만 2015. 11. 21. 계약해지 이후에는 원고들이 소외 회사로부터 출동 등 업무지시를 받고 보수도 소외 회사로부터 지급받았다. 소외 회사는 피고와 상호, 대표자 및 본점이 다르고 별도의 조직과 사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원심은 소외 회사가 피고와 별개의 법인격을 갖지 못한 형식적 법인이라거나 피고의 법률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소외 회사로의 소속 변경 이후에도 원고들이 계속하여 피고의 근로자였다는 주장과 불법파견에 따른 직접고용의무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퇴직금 청구권은 피고와의 근로관계가 종료된 2015. 11. 21. 발생하였다. 그런데 원고들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1. 6. 25.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피고는 원고들의 퇴직금 청구권이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10조에서 정한 3년의 소멸시효 완성으로 소멸하였다고 항변하였다.

원심의 판단

원심은 원고들의 퇴직금 청구권에 대한 소멸시효가 형식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하였다.
원심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근거로 들었다.
첫째, 원고들은 피고와 계약을 해지한 당일 소외 회사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 종전과 동일한 장례의전 업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당시 상당수 장례지도사도 같은 방식으로 소속만 변경한 채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둘째, 피고는 계약해지 당시 원고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퇴직금 청구권의 발생이나 행사에 관하여 별도의 고지·안내도 하지 않았다.
셋째, 원고들로서는 소외 회사에서 최종적으로 퇴직할 때 피고 근무기간까지 합산한 전체 근무기간에 대한 퇴직금을 지급받을 것으로 신뢰하였다고 볼 수 있었다.
넷째, 원고들이 짧게는 2년, 길게는 7년 5개월 이상 피고에게 근로를 제공하였으므로 보호의 필요성이 컸다.
원심은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퇴직금 지급의무가 있음에도 원고들에게 아무런 안내를 하지 않은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퇴직금 지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다고 보았다.
이에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고, 피고에서 근무한 기간에 해당하는 퇴직금과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명하였다.

법리

채무자의 소멸시효 항변권 행사도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적용을 받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소멸시효 완성의 주장이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
첫째,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한 경우이다.
둘째,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권리행사나 시효중단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한 경우이다.
셋째,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던 경우이다.
넷째, 시효완성 후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채권자에게 그러한 신뢰를 형성한 경우이다.
다섯째,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를 변제받는 등의 사정으로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한 경우이다.
그러나 소멸시효 제도는 법률관계에 일정한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여 당사자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제도이다.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시간의 경과가 제도의 핵심이므로, 일반조항인 신의칙을 근거로 소멸시효 제도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침해할 수 있다.
따라서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신의칙 위반 또는 권리남용으로 배척하는 데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원고들이 소외 회사로 소속을 변경한 후에도 종전과 동일한 업무를 계속하였다는 사실이나, 피고가 계약해지 당시 퇴직금 발생과 지급에 관하여 안내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피고가 원고들의 권리행사를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피고가 원고들에게 퇴직금 청구권의 행사나 시효중단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피고는 원고들뿐 아니라 같은 지위의 다른 장례지도사들에게도 퇴직금에 관한 고지·안내 또는 정산을 하지 않았다.
특히 원고들과 같은 지위에 있던 일부 장례지도사들은 계약해지 합의로부터 약 8개월이 지난 2016. 7. 21. 피고를 상대로 퇴직금 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2017. 4. 14. 제1심에서 전부 승소하였다.
따라서 원고들도 늦어도 위 제1심판결이 선고된 무렵에는 자신들에게 피고에 대한 퇴직금 청구권이 발생하였음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원고들은 2015. 11. 21.부터 3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퇴직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객관적인 권리행사 장애사유도 없었다.
피고가 시효완성 후 시효이익을 포기하거나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인 사실도 없었다. 같은 처지의 다른 장례지도사들이 시효완성 후 피고로부터 퇴직금을 지급받았다거나 원고들에게 다른 채권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보호 필요성이 있다고 볼 사정도 없었다.
결국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퇴직금 지급을 거절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칙에 반하지 않는다.

결론

대법원은 원고들이 피고와 계약을 체결하고 근무한 기간에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원고들이 소외 회사로 소속을 변경한 뒤 동일한 업무를 계속하였고 피고가 퇴직금에 관하여 안내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소멸시효 항변을 권리남용으로 배척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권리남용으로 보아 퇴직금 지급을 명한 원심판결 중 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그 부분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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