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번호
관련판례
대법원 2003. 12. 12. 선고 2001다29896 판결은 타인의 성명을 모용하여 본인 명의로 직접 법률행위를 한 경우, 모용자에게 기본대리권이 있고 상대방이 모용자를 본인으로 믿은 데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금융기관은 본인과 대리권을 확인할 때 일반인보다 높은 주의의무를 부담한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 2014. 5. 29. 선고 2012다66303 판결도 명의모용자가 본인을 대리할 기본대리권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에게 본인행위라고 믿을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민법 제126조를 유추적용할 수 있다는 법리를 확인하였다.
관련법령
민법 제126조는 대리인이 권한 외의 법률행위를 한 경우 제3자가 그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본인이 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하도록 규정한다.
사실관계
원고는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라 대출업을 영위하는 금융회사로서, 대출모집법인과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에 관한 모집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하였다. 위탁업무에는 대출신청인의 자필서명 확인, 대출서류의 접수·확인 및 임대차조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고는 2019. 8. 22. 임대주택을 보증금 2억 2,000만 원에 임차하고, 대출모집법인의 운영자와 업무담당자들에게 다른 금융회사로부터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을 받는 데 필요한 서류 작성을 위임하였다. 피고는 이들에게 인감증명서, 주민등록표 초본·등본, 예금통장 및 피고 명의의 휴대전화를 교부하였다.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은 피고의 위임에 따라 다른 금융회사에서 정상적으로 선행 대출을 받은 후, 피고의 인감증명서와 휴대전화 등을 보유하고 있음을 이용하여 피고 명의의 대출신청서와 대출계약서를 위조하였다. 이들은 선행 대출 사실을 숨긴 채 동일한 임대차보증금 반환채권을 담보로 원고에게 다시 대출을 신청하였다.
원고는 서류심사와 피고 명의 휴대전화에 대한 확인만을 거쳐 2019. 8. 29. 피고 명의 계좌로 2억 892만 5,000원을 송금하였다. 이후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의 서류 위조와 이중대출 사실이 밝혀지자, 원고는 피고에게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출원리금의 지급을 청구하였다.
법리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는 원칙적으로 대리인이 본인을 위한 것임을 명시적·묵시적으로 표시하거나 대리의사를 가지고 권한 외의 행위를 한 경우에 성립한다.
그러나 타인이 대리행위임을 표시하지 않고 본인의 성명을 모용하여 자신이 마치 본인인 것처럼 기망한 뒤 본인 명의로 직접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도 다음 요건을 갖추면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
첫째, 명의모용자에게 본인을 대리할 기본대리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상대방이 명의모용자를 본인 자신으로 믿은 데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은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이 피고 명의의 서류를 위조하여 제출한 일련의 행위를 피고의 성명을 모용하여 자신들이 마치 피고인 것처럼 기망하고 피고 명의로 직접 법률행위를 한 것과 동일하게 평가하였다. 따라서 원심이 대리행위 자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표현대리 법리의 적용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다만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원고에게 정당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원고는 대출신청인의 자필서명 확인, 대출서류 확인 및 임대차조사 등 대출업무의 핵심적인 부분을 대출모집법인에 위탁하였다. 이를 통하여 대출상품 판매와 분업의 이익을 얻는 한편 서류의 위조 여부를 직접 확인할 기회를 스스로 제한한 것이므로, 그 거래구조에서 발생한 위험도 원칙적으로 원고가 부담해야 한다.
금융회사는 대출모집인의 불법·부당한 모집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교육·관리·감독의무를 부담하며, 금융거래에서 본인과 대리권을 확인할 때 일반인보다 높은 주의의무를 부담한다.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은 약 10개월 동안 16회에 걸쳐 15명의 명의를 모용하여 합계 약 34억 5,777만 원을 이중으로 대출받았고, 이 사건 대출은 그중 마지막 대출이었다. 반복된 대출의 계약일·입주일과 대출신청 시점 등에 이례적이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으므로, 원고가 적절히 관리·점검하였다면 이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고는 대출상담사의 사진 등 등록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대출상담사와 대출명의자의 동일성 여부를 확인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임대인에게 임대차보증금 반환채권에 선순위 담보가 설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였다면 이중대출을 방지할 수 있었다.
원고가 대출 실행 직전에 피고 명의 휴대전화로 연락하여 대출의사를 확인한 사실만으로는 이러한 본인확인 및 관리·감독상의 과실이 해소되지 않는다. 원고는 대출 실행 후에도 신용정보조회 시스템의 반영 지연 가능성을 고려하여 이중대출 여부를 사후 점검했어야 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에게 피고를 대리할 기본대리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원고가 이들을 피고 본인으로 믿은 데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볼 수 없었다.
결론
대법원은 타인이 본인 명의를 모용하여 본인 명의로 직접 계약한 경우에도 일정한 요건 아래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금융회사인 원고가 대출업무의 핵심 부분을 대출모집법인에 위탁하면서 본인확인과 대출모집인에 대한 관리·감독을 충분히 하지 않은 이상, 명의모용자를 본인으로 믿은 데 정당한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피고의 표현대리책임을 부정한 원심의 결론을 유지하고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