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25. 8. 14. 선고 2023다294180 판결
이 판결의 핵심은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로 거짓 재무정보가 공시되어 투자자가 회사채를 고가로 매수한 경우 손해가 언제 발생하고, 그 손해액을 어떻게 산정하며, 이후 이자 수령이나 출자전환 등으로 회수한 금액을 손해액에서 공제할 수 있는지입니다.
대법원은 투자자가 거짓 공시로 실제 가치보다 높은 가격에 사채를 매수한 때 손해가 발생하고, 원칙적으로 매수가격과 정상가격의 차액이 손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사채 매수 이후의 이자 수령이나 출자전환 등은 원칙적으로 손해액에서 공제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1. 사건의 개요
상장회사인 피고 회사는 장기간에 걸쳐 매출액·매출원가와 관련 자산·부채를 과대 또는 과소 계상하고, 장기매출채권의 대손충당금을 과소 계상하는 등의 분식회계를 하였습니다.
회사의 외부감사인인 회계법인은 회사의 재무제표가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되었다는 감사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회사는 이러한 재무제표를 포함한 사업보고서와 증권신고서를 공시하고 회사채를 발행하였으며, 국민연금공단은 발행시장 또는 유통시장에서 회사채를 매수하였습니다.
이후 분식회계와 부실감사가 밝혀지면서 금융위원회와 증권선물위원회는 회사와 회계법인에 과징금, 업무정지 및 감사업무 제한 등의 제재를 하였습니다.
회사의 재무상태가 악화되자 사채권자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사채 만기의 연장
사채 이자율의 인하
사채 권면액 중 50% 이상의 출자전환
출자전환 대상 사채 원금과 신주 인수대금의 상계
국민연금공단은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로 회사채의 가치를 잘못 판단하여 실제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매수하였다며 회사와 회계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2. 주요 쟁점
이 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사채권자집회의 채무조정 및 출자전환 결의로 손해배상채권도 포기되거나 면제되었는지
거짓 공시로 고가에 사채를 매수한 투자자의 손해가 언제 발생하는지
손해액을 사채 매수가격과 정상가격의 차액으로 산정할 수 있는지
사채 매수 이후의 이자 수령과 출자전환 등으로 회수한 가치를 손해액에서 공제해야 하는지
사채의 정상가격을 산정한 감정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지
그중 판결의 핵심 법리는 사채의 고가 매수로 인한 손해액 산정과 후발적 회수금액의 손익상계 여부입니다.
3. 사채권자집회의 결의와 손해배상채권의 관계
사채권자집회에서는 사채의 만기를 연장하고 이자율을 낮추며 사채 원금 일부를 출자전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결의만으로 투자자가 회사와 회계법인에 대한 불법행위 손해배상채권까지 포기하거나 면제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사채권자집회의 결의는 회사에 대한 사채 원리금 채권의 조건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반면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채권은 거짓 공시로 사채를 고가에 매수하여 발생한 별개의 불법행위 채권입니다.
따라서 사채의 만기 연장이나 출자전환에 동의했다는 사정만으로 손해배상채권도 포기하였다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금반언이나 공평한 손실부담의 원칙에 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4. 손해의 발생 시점
대법원은 거짓 기재로 투자자가 회사채의 가치평가를 그르쳐 정상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채를 매수하였다면, 사채를 매수한 시점에 손해가 발생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는 회사가 이후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거나 사채권자집회에서 채무조정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손해가 발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투자자는 사채를 매수하는 순간 실제 가치보다 더 많은 대금을 지급하였으므로, 그 시점에 이미 재산상 불이익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다음과 같이 파악됩니다.
거짓 기재가 없었더라면 정상적인 시장에서 형성되었을 사채가격보다 실제로 더 지급한 금액
5. 손해액 산정방법
증권신고서·사업보고서·감사보고서의 중요사항이 거짓으로 기재되어 투자자가 사채를 고가로 매수한 경우 손해액은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이 산정합니다.
실제 사채 매수가격 - 거짓 기재가 없었더라면 형성되었을 사채의 정상가격
손해액의 기준시점은 불법행위가 이루어진 사채 매수 시점입니다.
여기서 정상가격은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로 왜곡된 재무정보가 시장에 제공되지 않았더라면 해당 시점에 형성되었을 사채의 실제 가치입니다.
따라서 회사가 최종적으로 지급하지 못한 원리금 전액이나 투자자가 최종적으로 회수하지 못한 금액을 손해로 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정보로 인하여 사채가격에 형성된 과대평가 부분만을 손해로 산정합니다.
6. ‘사채를 아예 매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과 손해액
피고들은 거짓 기재가 없었다면 투자자가 사채를 아예 매수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정상가격을 전제로 한 차액 손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투자자는 거짓 정보가 없었다면 사채를 매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적 투자기회의 상실 전체를 손해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거짓 정보 때문에 사채를 정상가격보다 비싸게 매수한 부분을 손해로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손해는 사채 매수가격과 정상가격의 차액으로 산정할 수 있고, 거짓 기재가 없었다면 투자자가 실제로 사채를 매수했을 것인지까지 별도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7. 사후 회수금액과 손익상계
손익상계가 인정되려면 다음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손해배상책임의 원인행위로 피해자가 새로운 이익을 얻었을 것
그 이익과 불법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을 것
그 이익이 배상의 대상이 되는 손해와 대응하는 관계에 있을 것
대법원은 투자자가 사채 매수 이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일부 금액이나 가치를 회수하였더라도, 이를 원칙적으로 손해액에서 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사채 이자를 수령한 경우
사채 일부를 출자전환하여 신주를 취득한 경우
사채 만기가 연장되어 향후 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사채 일부를 매도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회수한 경우
그 이유는 이 사건 손해가 최종적인 미회수 원리금이 아니라 사채 매수 당시의 고가 매수 차액이기 때문입니다.
사채 매수 이후 이자나 출자전환 주식을 취득하는 것은 사채권 자체에 기초한 권리의 실현입니다. 이는 분식회계라는 불법행위로 새롭게 얻은 이익이라고 보기 어렵고, 매수 당시의 가격 왜곡으로 발생한 손해와 직접 대응하지도 않습니다.
8. 정상가격 이상으로 사채를 매도한 경우의 예외
대법원은 후발적 회수가 손해액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투자자가 사채를 매수한 후 이를 매수 당시의 정상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실제 매도한 경우에는 손해가 현실적으로 회복되었다고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 기재로 100에 매수한 사채의 당시 정상가격이 70이었다면 원칙적 손해는 30입니다. 그런데 이후 투자자가 사채를 85에 매도하였다면 정상가격을 초과하여 회수한 15가 손해액 산정에 반영될 여지가 있습니다.
반면 이자 수령이나 원금 일부 회수처럼 사채의 정상적인 권리 실현에 해당하는 금액까지 모두 공제하면, 매수 당시 발생한 가격 왜곡 손해와 성격이 다른 이익을 공제하는 결과가 됩니다.
9. 감정결과의 증명력
사채의 정상가격은 실제 시장에서 관찰할 수 없는 가상적 가격이므로 통상 감정을 통해 산정하게 됩니다.
대법원은 감정인의 감정방법이 경험칙에 반하거나 합리성이 없는 등의 현저한 잘못이 없는 한 감정결과를 존중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동일한 사항에 관하여 여러 감정결과가 서로 다르더라도 각각의 감정방법에 현저한 잘못이 없다면, 그중 어느 감정결과를 채택할지는 원칙적으로 사실심 법원의 판단에 속합니다.
따라서 상고심에서 단순히 다른 평가방법을 적용하면 다른 정상가격이 산출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심이 채택한 감정결과를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10. 회사와 회계법인의 책임제한
원심은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회사의 책임을 전체 손해의 60%, 외부감사인인 회계법인의 책임을 전체 손해의 20%로 제한하였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책임제한이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거나 사실심의 재량 범위를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회사와 회계법인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11. 판결의 핵심 취지
이 판결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분식회계와 부실감사에 따른 거짓 공시로 투자자가 사채를 정상가격보다 비싸게 매수하였다면, 사채 매수 시점에 매수가격과 정상가격의 차액 상당 손해가 발생한다. 이후 이자 수령이나 출자전환 등으로 일부 가치를 회수하였더라도 이는 원칙적으로 불법행위로 얻은 이익이 아니고 고가 매수 손해와 대응하지 않으므로 손익상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2. 판결의 의의
이 판결은 회사채 투자에서 발생하는 두 종류의 손실을 명확히 구별하였습니다.
첫째는 거짓 공시로 사채를 실제 가치보다 비싸게 매수하여 발생한 가격 왜곡 손해입니다.
둘째는 회사의 재무상태 악화나 채무조정으로 사채 원리금을 회수하지 못하여 발생한 신용위험 또는 미회수 손해입니다.
이 사건에서 인정된 손해는 첫 번째 유형입니다. 따라서 사후적으로 원리금 일부를 회수하거나 출자전환 주식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 번째 유형의 손실과 단순 비교하여 손해액에서 공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판결은 손익상계 여부를 판단할 때 형식적으로 투자자가 받은 모든 금액을 공제할 것이 아니라, 인정된 손해의 성질과 사후 취득한 이익의 성질이 서로 대응하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