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명의모용과 권한을 넘는 표현대리

핵심 결론 타인이 본인의 명의를 도용하여 본인인 것처럼 계약한 경우에도 기본대리권과 상대방의 정당한 신뢰가 인정되면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금융회사가 본인 확인 등 핵심 업무를 대출모집인에게 맡겨 위험을 확대하고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였다면 정당한 이유가 인정되지 않으며, 명의도용 피해자는 대출계약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이 자료는 서권식 변호사가 실무를 처리하면서 참조한 판례를 바탕으로, 실무상 유의할 점에 주안점을 두고 법리적 쟁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법원 2025. 6. 5. 선고 2023다232526 판결

1. 사건의 사실관계


피고는 임대차보증금 2억 2,000만 원의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대출모집법인 관계자들에게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 업무를 위임하였다. 피고는 이를 위해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초본, 통장 사본 및 피고 명의 휴대전화 등을 교부하였다.

대출모집인들은 피고의 위임에 따라 먼저 다른 금융회사에서 정상적으로 대출을 받았고, 그 대출금은 임대인에게 임대차보증금으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대출모집인들은 첫 번째 대출 내역이 신용정보조회 시스템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점을 이용하여, 피고 명의의 대출신청서와 대출계약서를 위조하고 동일한 임대차보증금 반환채권을 담보로 원고 금융회사에서 다시 2억 900만 원을 대출받았다.

원고는 인지대를 공제한 2억 892만 5,000원을 피고 명의 계좌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피고는 두 번째 대출을 위임하거나 승인하지 않았다. 관련 형사판결에서도 대출모집인들이 피고 등 임차인들의 명의를 이용하여 차주 명의 계좌로 대출금을 송금받아 편취한 사실이 인정되어 유죄판결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두 번째 대출금은 피고 명의 계좌에 입금되었지만, 피고가 그 돈을 실제로 지배·사용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최종적으로 보유하였다는 사실은 판결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2. 소송의 쟁점


원고 금융회사는 피고에게 대출원리금 약 2억 925만 원의 지급을 청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피고가 대출모집인들에게 대출계약 체결에 관한 포괄적인 대리권을 부여하였으므로 두 번째 대출계약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 실제 대리권이 없더라도 피고가 첫 번째 대출에 관한 기본대리권을 부여하고 인감증명서·통장·휴대전화 등을 교부하였으므로 민법 제126조의 권한을 넘는 표현대리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첫 번째 대출만 위임하였을 뿐 두 번째 대출을 위임한 사실이 없고, 대출모집인들이 피고 명의를 도용하여 대출금을 편취한 것이므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3. 실제 대리권에 따른 책임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가 대출모집인들에게 부여한 권한은 첫 번째 금융회사로부터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을 받는 업무에 한정되었다.

두 번째 대출신청서와 대출계약서는 피고의 허락 없이 위조되었고, 피고는 해당 대출계약의 체결에 관여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은 피고가 두 번째 대출계약 체결 권한까지 부여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유권대리에 따른 대출계약상 책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4. 명의모용에도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는 원칙적으로 대리인이 본인을 위한 행위임을 표시하면서 대리권의 범위를 넘은 경우에 성립한다.

그런데 이 사건 대출모집인들은 자신들이 피고의 대리인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피고의 성명을 모용하여 마치 피고 본인이 직접 대출을 신청한 것처럼 행동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피고가 전혀 관여하지 않은 명의모용 행위에는 대리행위 이론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명의모용자가 대리인임을 표시하지 않고 본인인 것처럼 법률행위를 하였더라도 다음 요건이 충족되면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명의모용자에게 본인을 대리할 기본대리권이 있었을 것
상대방이 명의모용자를 본인 자신으로 믿었을 것
그렇게 믿은 데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것

따라서 명의모용이라는 이유만으로 표현대리의 적용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5. 금융회사에 ‘정당한 이유’가 인정되지 않은 이유


대법원은 대출모집인들에게 첫 번째 대출에 관한 기본대리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원고 금융회사가 두 번째 대출을 피고 본인의 신청으로 믿은 데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원고는 대출신청인의 자필서명 확인, 대출구비서류 확인, 임대차조사 등 대출업무의 핵심적인 부분을 대출모집법인에 위탁하였다. 이를 통해 대출판매 확대와 분업의 이익을 얻는 한편, 서류 위조 및 본인 여부를 직접 확인할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였다.

금융회사가 이러한 거래구조를 선택하였다면 그로 인한 위험도 원칙적으로 금융회사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구체적으로 원고에게는 다음과 같은 과실이 있었다.

피고 명의 휴대전화로 형식적인 확인만 하였을 뿐 실제 통화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은 점
임대차보증금이 이미 전액 지급된 뒤 다시 대출이 신청된 이례적인 상황을 조사하지 않은 점
임대인에게 보증금 지급 및 선순위 담보 설정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점
동일한 대출모집법인을 통한 16회의 이중대출을 적발하지 못한 점
대출모집인에 대한 사전교육·관리·감독 및 사후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점
서류 위·변조 방지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점

금융회사는 본인 및 대리권 확인에 관하여 일반인보다 고도의 주의의무를 부담하므로, 단순히 명의도용 사실을 몰랐다는 것만으로 정당한 이유가 인정되지는 않는다.

6. 피고 명의 계좌로 대출금이 입금된 의미


두 번째 대출금이 피고 명의 계좌에 입금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이는 대출계약의 성립이나 피고의 표현대리책임을 당연히 인정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당시 대출모집인들이 피고의 통장과 휴대전화 등을 보유하고 있었고, 관련 형사판결에서는 이들이 임차인 명의 계좌로 대출금을 송금받아 편취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반면 피고가 두 번째 대출금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최종적으로 보유하였다는 사실은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은 피고가 대출금을 실질적으로 취득하고도 책임을 면한 사건이 아니다. 대출모집인들이 피고 명의 계좌와 서류를 이용하여 대출금을 편취한 손실을 금융회사가 피고에게 대출계약상 채무로 전가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 사건이다.

원고의 청구도 대출계약에 따른 원리금 청구였을 뿐, 피고가 실제 보유한 이익의 반환을 구하는 부당이득반환청구는 아니었다.

7. 판결의 의의


서울고등법원은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전부 기각하였으며, 대법원은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명의모용에도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원심의 법리를 수정하였다. 그러나 금융회사에 정당한 이유가 없으므로 피고의 표현대리책임을 부정한 원심의 결론은 정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결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본인이 특정 업무에 필요한 인감증명서·통장·휴대전화 등을 대리인에게 교부하였다고 하여, 이를 이용한 모든 법률행위에 표현대리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문사업자가 외부 모집인을 이용하여 거래 확대의 이익을 얻으면서 본인 확인과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였다면, 그 거래구조에서 발생한 명의도용 위험을 무고한 명의자에게 전가할 수 없다.

대법원 2025. 6. 5. 선고 2023다232526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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